한국의 소규모 패션 브랜드들이 힘을 얻고 있다. 유기적인 유통망 구축과 경쟁력 있는 디자인을 보유하기 시작한 것. 그들의 다음이 매번 기대되는 이유다.
1 블랭코브
제품에 이야기를 담고 감성을 부여하는 것은 흉내만 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드는 사람의 생각과 취향이 반영되어야 가능하다. 블랭코브의 원대현은 '미니멀리즘'을 기반으로 2011년부터 가방을 만들고 있다. 그는 단순히 최고 품질의 자재와 부속품을 사용하기보다 가방에 이야기를 담고 그 이야기의 맥락과 배경에 맞는 자재와 부속품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최근 소개한 '모던 타임즈' 컬렉션은 미국 산업혁명 이후 1900년대 중반의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그리고 동명 영화인 <모던 타임즈>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했는데, 컬렉션 전체를 모노톤으로 구성하고 종이 질감이 나는 왁스 캠버스 소재를 선택했다. 부속품도 실제 미군이 쓰던 빈티지 군용 'U.S Milspec'을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영화 <모던 타임즈>의 개봉 연도인 1936년을 상징하는 '36'이 새겨진 캡, 프로듀서 '무드슐라(Mood Schula)'와 함께 작업한 믹스 음반을 발매했다고 하니 이만하면 문화 예술인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스트리트 문화에 기반을 둔 해외 브랜드들이 넘쳐난다. 그 속에서 묵묵히 국내 브랜드 하나가 자리매김하고 있다. 바로 라이풀이다. 라이풀은 2005년도 시작한 브랜드다. 지금이야 스트리트 문화가 익숙하겠지만 당시만 해도 미개지였다. 그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 스트리트 문화를 이끌어가는 선도자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스트리트 문화가 자리 잡기까지 라이풀의 역할이 한몫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의 의도는 이렇다. 메이저와 서브컬처의 연결고리 역할을 함과 동시에 국내 브랜드들이 보여줄 수 없는 독창성과 문화가 녹아 있는 제품과 브랜드를 만들고자 한다. 이번 가을, 겨울의 옷은 실용성을 강조했으며 베이스볼 재킷이나 패딩 베스트, 울 소재 재킷 등 다른 옷과도 매치하기 쉬운 부담 없는 옷들이 주를 이룬다. 또 라이풀 매장에는 자체 개발한 리즘(Rism)이라는 방향제 브랜드가 있는데, 100% 식물성 원료를 사용한 룸 스프레이와 향초, 고체 향수를 만나볼 수 있다.
최근 들어 국내 소규모 브랜드들의 특징은 보다 전문화되고 세분화되고 있다는 거다. 양말이면 양말, 모자면 모자처럼 말이다. 이런 브랜드들을 보면 다양하게 만들기보단 한 가지만 잘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이 곧 경쟁력이 되기도 한다. 모스 그린은 양말을 전문으로 만드는 브랜드다.
초록색, 더 정확히 말하면 모스 그린, 이끼색을 좋아해서 브랜드 네임을 그렇게 지었단다. 이번 시즌 양말들을 보면 마치 니트웨어를 입은 듯 포근한 소재와 색을 사용했다. 그래서 대부분 실크가 함유된 울 소재를 사용했다. 워싱 과정을 통해 착용감도 높였다. 양말이 주는 특유의 포근한 감성을 잘 끌어낸 브랜드다.
대부분 디자이너나 브랜드들의 옷을 보면 자신들만의 캐릭터나 이미지를 고수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브랜드 전략이지만 때론 그런 개성이 입는 사람에게 방해가 될 때가 있다. 그런 면에서 비슬로우는 그에 반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브랜드의 색깔보다는 입는 사람에 따라 그 이미지가 시시때때로 바뀐다. 때론 한없이 모던하다가도 어떨 땐 젊고 발랄해 보이기도 한다. 비슬로우는 그런 옷이다.
옷에 브랜드 이미지를 담지 않는다. 그래서 단순하고 간결하다. 비슬로우보다는 입는 사람이 부각된다. 그래서 좋다. 이번 시즌에는 패딩 소재를 많이 사용했는데,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모던함을 유지하고 있다.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허술하지도 않은, 적절한 수위의 실용적인 옷들이 대부분이다. 한남동에 가면 단독 매장이 있는데, 비슬로우에서 바잉하는 비슷한 수위(?)의 수입 브랜드들을 만나볼 수 있다.
놋트 팩토리는 브랜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매듭을 이용해 액세서리를 만드는 브랜드다. 팔찌를 주로 만드는데 수작업으로 정성스럽게 꼬아 견고하고 튼튼하다. 제품은 매듭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뉘는데, 없는 것은 은과 황동을 함께 쓰고 매듭은 가죽과 면으로 제작한다. 요즘 남자들의 팔찌 수요가 증가하면서 비슷한 콘셉트의 국내외 브랜드들이 많이 생겨났다. 올해로 2주년을 맞는 놋트 팩토리는 이런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철학과 소신을 담아 '진짜' 팔찌를 만들고자 한다.
머플러를 주로 만드는 레이버 데이는 집 밥 같은 브랜드다. 소박하게 차렸지만 먹을 때 정성과 온기가 느껴지는, 조미료보다는 오랜 시간 우려내 깊은 맛의 밥상 말이다. 면 100%만을 고집하며, 패턴의 다양성과 일관된 색감을 중요시한다. 니트 머플러보다 부피가 작아서 버거운 느낌이 덜하다. 외투 밖보다는 안쪽에 자연스레 두르기 좋다. 패턴은 복고적인 문양을 주로 사용한다. 그래서 아메리칸 캐주얼과 단짝이다. 머플러 하나만으로도 옷차림에서 소박하면서 따뜻함이 묻어난다. 머플러의 따뜻함은 만드는 사람의 온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 같다. 최근에는 머플러 외에 같은 분위기의 넥타이와 니트 비니까지 제품군이 다양해졌다.
가끔 국내 브랜드의 옷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헐렁'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곧 품질로 이어지며, 옷의 좋고 나쁨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스트 로그는 이런 취약점을 가장 잘 보완한 브랜드다. 그들이 만드는 옷을 보면 화려하진 않지만 '쫀쫀함'과 '짱짱함'을 느낄 수 있다. 한마디로 해외 어느 브랜드와 견주어도 품질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특히 이번 시즌은 그 어느 때보다 공을 많이 들인 듯 보인다. 아웃도어 캐주얼 특성상 디테일이 옷의 전부를 좌우한다는 것을 아는 거다. 또 그들은 국내 시장을 넘어 해외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얼마 전 열린 뉴욕의 캡슐 컬렉션에도 참가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해외시장을 겨냥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작은 구멍가게가 해외 대형 마트와 나란히 한 기분이랄까?
케이스 전문 브랜드다. 아이패드와 맥북용, 그 외 휴대폰 케이스 등을 주로 만든다. 페넥(Fennec)은 영어로 사막여우라는 뜻이다. 페넥은 귀가 아주 크고 밝아서 아주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것이 이 브랜드의 철학이다. 제품을 만드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반응하고자 한다. 그렇게 새로운 흐름에 동참하고 동시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길 원한다. 그렇다고 유행에 민감하다는 뜻은 아니다. 페넥은 품질을 우선시하며 디자인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디지털을 보듬으려는 거다.
PHOTOGRAPHY: 조성재 / EDITOR: 이광훈